오리엔탈 엑스레이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부전공하면서 주로 수묵화로 진행되는 한국화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을 통해 먹의 농담으로 빚어지는 수묵화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었다. 2년 전에 병원에서 척추를 찍은 X-ray를 들여다보면서 문득 수묵화가 되살아났다. 흑백이라는 점과 약간의 번짐 효과는 흡사 수묵화 먹의 농담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 이 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또한 현대사회를 대변하는 첨단 제품을 촬영하면서 X-ray를 예술 도구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 뢴트겐에 의해 X-ray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X-ray의 해로움을 알지 못한 그는 자신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키거나 자신의 부인 손과 같은 다양한 소재를 유희의 수단으로 촬영하였다. 이처럼 유희로 시작된 X-ray 촬영은 방사선의 위험성이 알려지고 의료용으로 한정되어 발전되면서 오늘날 제한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만약, X-ray가 유희용으로 계속 발전하여 현대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응용되었을까? 이 작업은 X-ray를 예술로 활용한 작업이다.
촬영은 아주대 영상의학과 김선용 교수의 배려로 아주대병원에서 진료가 끝난 밤 시간에 디지털 X-ray 촬영기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수묵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백이 많으며, 이 여백은 작업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인화는 한지에 디지털 프린트 방식을 선택하였으며, 낙관을 직접 찍고, 마무리는 액자 대신에 족자를 이용함으로써 수묵화 분위기를 충분히 살렸다.
X-ray를 이용한 디지털 사진을 방법적으로 채택한 이 작업은 내용 면에서는 순수사진이면서 방법적인 면에서는 과학사진에 해당한다. X-ray 같은 기술이 사진일 수 있는지 묻는다면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나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사용했을 시기에도 같은 질문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사물의 내면을 흑백으로 볼 수 있는 X-ray의 특성과 묵의 농담으로 자연의 내적인 본질을 표현하는 동양 수묵화의 특성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 작업을 통해 X-ray가 가지는 21세기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예술과 과학, 고전과 현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일반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며, 일반 관객들에게는 예술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곤계란 시리즈
초등학교 때였을까. 동네 시장 골목에 있는 노점 음식점에서 소주 한잔과 함께 어른들이 병아리 얼굴로 보이는 무언가를 먹고 계셨다. 걸음을 못 옮기고 있는 나에게 주인집 아주머니가 무어라 소리치시는 듯 했지만,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던 기억이 있다.
마오딴(毛蛋)은 중국에서 먹는 식용병아리의 이름이다. 털이 난 달걀이라는 뜻의 이 마오딴은, 발육이 중지된 반 부화 달걀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마오딴, 필리핀에서는 발롯, 한국에서는 곤계란 이라 부른다. 영양이 풍부하여 몸에 좋다는 소위 ‘건강식’인 이 음식이 어린 나에게는 공포의 산물로 어린 시절 한 때를 밤낮으로 괴롭혔었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 까지 일까? 몇 해 전에 ‘Taxidermie’라는 영화를 보았다. ‘박제사’라는 제목의 이 영화에서 어떤 한 중년 남성이 박제사인 마지막 주인공에게 인간의 태아를 박제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는 소원을 이룬다. 이 끔찍한 장면들 속에서 나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옛 기억 속의 마오딴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보양을 위하여 이제 막 빛을 보려고 준비 중인, 세상을 향해서 날개를 펴보려고 하는, 태어나기 직전의 병아리를 통째로 삶아서 먹는 인간. 나 자신은 채식주의자가 아니고(사실, 육식주의자라고 표현해야 옳을 정도이다.) 동물보호단체 소속도 아니다. 단지 작은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X-ray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얇은 껍질 안에서의 혼돈 속에서도 점점 형태를 잡아가는 병아리에게서 오는 경이감과 작은 원형 안에 몸을 웅크리고 큰 심호흡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작업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처음 작업은 30개 들이로 대변되는 계란 한판 안에서의 카오스를 표현하는 시리즈 (Etude 시리즈)이다. 그리고 한 마리 한 마리의(한 마리라 해야 할 지 한 알이라 해야 할 지 아직도 못 정하고 있다.) 디테일한 모습을 피의 색이자 따뜻한 색인 붉은 빛 안에 휩싸이게 표현하여, 마치 배 안의 태아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작업은 원형에서 오는 다양한 아름다운 형상들을 그로테스크한 마오딴으로 채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리하여 나오게 된 시리즈가 metamorphosis (변형, 변이) 작업이다.
누구나 달을 보며 여러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그리운 님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토끼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정복해야 할 미지의 땅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 밤하늘이란, 창조와 소멸을 거듭하는 삶을 이야기 하는 숨 쉬는 생명체들의 집합이다. 여기에 죽음이 예견된 삶을 준비하는 곤계란이 있다.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원안에 앉아있는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업은 환상적-과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이 작품들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말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